열력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열력

열력

음성백 박서장군

박서장군은 고려 고종 18년(1231년) 서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몽골장수 살레탑이 쳐들어와 철주(압록강 부근의 고을)을 함락하고 귀주를 공격하자 이를 크게 물리쳐 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를 제수받고 음성백에 봉해졌다.

관향조 박서의 자는 양종, 호는 죽계, 시호는 충정으로 평안북도 정공사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의 용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시조 박서장군이 1231년(고종18년)서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세계를 향해 진군하던 몽고가 고려에도 침략을 일으켜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에게 별군을 주어 고려를 장악하도록 명령하였다. 고려는 당시 정중부의 구데타(1170년/의종24년)로 시작된 군인 집권시대가 최충헌의 집권으로 아들 최우와함께 2대째 집권을하고 있어 몽고군은 거침없이 진격에 이르러 개경을 포위하고 충주까지 진격 최우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의를 맺고 몽고군은 이듬해 철수하였다.그러나 몽고의 침입에서 천하무적 몽고 기병의 영예를 여지없이 깨뜨린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박서장군이 지킨 귀주성 전투였다.

살리타이는 귀주성 전투에서 부하들의 희생은 너무 큰 반면 귀주성은 끄덕도 하지 않자 모욕감과 분노는 경탄과 존경으로 바뀌고 결국 고종에게 귀주성에 사절을 보내 항북을 명령하도록 요구하였다.

지병마사 최림수와 감찰어사 민희가 "임금의 명령을 거스를 셈이냐? 차리리 내가 죽겠다"하고 칼을 빼들자 박서장군은 왕명을 어길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지켜 순응하고 성을 열고 항복하고는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음성으로 낙향하였다.

성 안 팍을 둘러본 70세의 몽고군 장수 살리타이는 "내평생 천하에 전쟁을 다녔어도 이런 공격을 받고 항복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탄복해 마지 않았다고"고 한다" 이후 귀주성을 굳게 지켜 몽고군을 격퇴한 철혈용장 박서장군은 문하시랑평자사에 제수되고 충정공의 시호와 함께 음성백에 봉해졌으며, 충절과 무공을 기리고자 조선 숙종 30년(1704년) 예조판서 민진후의 주청으로 평안북도 귀주에 정공사가 세워졌고 이듬해 사약서원이 되었다.

아들 재는 고려 때 공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손자 현계는 고려 충숙왕 때 전리총랑, 평해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327년(충숙왕14년) 정승 윤석과 함께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 되었으며, 아들 문서, 문길, 문환 등 3형제를 두어 이때부터 가문이 크게 번성되었다.

문서는 고려 때 봉익대부로 강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장자 제는 1388년(우왕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시판사가 되었으며, 1398년(태조7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으면 3녀를 두었다.

차자 원은 조선 때 첨의정승을 역임하였고, 길재, 정몽주와 교유하였으며, 중국에 사신 으로 다녀와 노상시를 남겼으며,  ☞정승공파의 파조이시다.

문길은 고려조에서 문하시랑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순과 정을 두었다.

함흥차사 박순

예부터 심부름을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라고 한다. 이것은 조선 초에 생긴 말로 태조 이성계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이른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지켜보며 극도로 상심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가 버린 뒤 아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누차 사신을 보내어 귀경을 요청하였으나, 이성계는 돌어 오지 않고 아들이 보낸 사신들을 죽여 버렸다. 부자간의 싸움으로 조선의 신하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

이때 순이 자청하여 혼자서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으로 갔다. 행궁 앞 소나무에 새끼 말을 매어놓고 어미 말을 타고 들어갔다. 그러자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러 쳐다보며 울어댔다.

태조가 평복으로 찾아온 옛 친구 순을 맞이하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말의 사연을 물었다. 순이 말하기를 "새끼 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하며 "비록 미물이라도 지친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라고 했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멀어진 사이를 비유한 것이다. 태조는 슬퍼하며 옛 친구인 순을 머물러 있게 하였다. 하루는 태조와 순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 한마리가 자기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질 죽을 지경에 놓였다. 그런데도 쥐 두 마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였다.

순이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받고 떠날 때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이전처럼 이 차사도 죽일 차비를 했다. 태조는 옛 친구와의 우의를 생각하며 차마 죽일 수 없어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순이 용흥강을 건너가 추격이 어려울 것을 짐작하여 이르기를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순은 도중에 병이 나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나루터에서 추격자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조선 초 마지막 함흥차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태종은 순에게 판중추부사에 추증하고 자손도 벼슬에 등용했다. 남편의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에게는 열녀의 정문을 세우게 했다(☞ 순의 시호는 충민으로 충민공파의 파조가 되신다).

순의 아우 정은 조선 태종 때 세자빈객, 예문관 직제학, 예조판서를 거처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익으로(☞문익공파의 파조이시다).

한편, 순의 아들 소는 좌승지로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으며, 손자 숙진(병조참판 흔의 아들)은 대사헌을, 숙무는 세종 때 나주목사를, 숙달은 성종 때 예조참의, 숙창은 병마평사, 숙번은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또 박순의 둘째 아들 흔은 병조참판을 지냈고 8세에 이르러 문형은 좌찬성, 조는 내자 시정, 그 외 붕은 판관, 곤은 사예, 유경은 참의, 인원은 부사 등을 지내 조선 초, 중기에 음성박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무학대사

박서 장군은 몽고군에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항복을 하여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을 하려다 부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죽지 못하고 서민의 신분으로 해인사 계곡을 따라 방랑의 길로 나서 고향으로 가던 길에 옛날 휘하에 있던 부하를 만난다. 부하는 술자리에서 예랑이라는 누이동생을 소개해 주어 인연을 맺게 해주어 예랑 사이에 불옥(佛玉)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불옥’은 일연선사가 박서장군에게 예언한 ‘이상한 인연으로 아들을 낳거든 ’불옥‘이라 지으라’던 예언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아버지 박서 장군의 유언에 따라 불옥은 지리산 청학동으로 가서 20년 수도한 끝에 ‘백련거사’가 되었다. 불옥은 인일(仁一)을 낳았고, 인일은 지리산에서 청학도인으로부터 감여사상을 배웠는데, 도인은 인일에게 ‘채씨 성을 가진 벙어리 처녀가 10년 전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와 사이에 장차 새 왕조가 탄생할 때 그 왕조를 비밀리에 돕게 되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사실은 인일과 결혼을 하기 위해 벙어리가 아니고 벙어리 행세를 한 것이고 아들 무학을 출산한 후에 입을 열게 되었다).

충렬왕때 몽고와 고려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려다 실패하자 왜구들은 그 앙갚음으로 고성포구에 상륙하여 진주, 의령 등을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박씨 인일 부부도 포박되어 끌려 다니다 ‘모월리 학돌고개’라는 곳에서 학바위 밑에 낙엽을 모아 깔고 옥동자를 분만했는데 이때가 고려27대 왕인 충숙왕 14년(1327년) 정묘년 9월 20일 이었다. 학바위 아래 핏덩이를 놓아둔 채 관도에게 끌려간 채씨 부인을 보고 동헌의 수령은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라 했다. 그리하여 아이가 놓여있는 학돌재로 돌아가 가보니 푸른 빛깔의 학 다섯 마리가 아이를 둘러싸 덮고 있다가 너울 너울 춤을 추며 날아갔다. 그리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 부르게 되었다. 충주시 가금면 하구암리에 무학골이 있는데 무학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국지명총람’에 기록이 있다.

Copyright © 2020 벽진서원. All rights reserved.